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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과 의지로 일군 관광 도시 창춘(長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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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과 의지로 일군 관광 도시 창춘(長春)
  • 오재랑 기자
  • 승인 2012.12.14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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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내면에 잠긴 쓰라린 중국사를 엿보다!
▲창춘시내

[투어코리아=오재랑 기자] 중국의 창춘(장춘,長春)은 지린(길림,吉林)성의 중심 도시인 성도이다. 오늘날 장춘은 길림성의 정치, 경제, 문화와 교통의 중심지로 성장, 중국에서는 ‘자동차, 삼림, 영화’의 도시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장춘의 평원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중국의 중요한 곡창지대 중 하나이다.80년 전 장춘은 일제가 세운 만주국의 수도였다.

 

이 곳에서 청조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가 일본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며 머물렀고, 위만 황궁, 위만 국무원, 팔대부, 위만중앙은행 등이 아직까지 남아 일본에 침략 당한 중국의 아픈 역사를 대변해주고 있다.

 

일본의 악행 현장 ‘위만황궁’
중국 길림성(吉林省) 장춘(長春) 기차역에서 서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위만황궁박물관(僞滿皇宮博物館/위만황궁:僞滿皇宮)은 규모가 13만7,000㎡에 달한다.

 

위만황궁은 ‘가짜 만주 황궁’이란 뜻이다. 즉 일본의 사주로 세워진 만주국을 일컫는다.

 

▲궁내부

위만황궁은 북경(北京)의 자금성(紫禁城), 심양의 고궁과 함께 중국 3대 궁정 유적지로 지정돼 있다.

 

또 청(淸)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溥儀:1906-1967)가 수인(囚人)이나 다름없는 신세로 궁핍하게 살던 집이다. 푸이는 그곳에서 1932부터 1945년까지 13년 4개월 동안 황제로 생활하며 직무를 봤다.

 

위만황궁 성벽은 동서로 대칭되지 않는 두 개의 뜰로 나뉘어져 있다. 서원은 세 겹으로 된 4합원(四合院)인데 전통적인 4합원과 다른 점은 정면에 모두 2층으로 된 청색 벽돌 2층집이 있다는 것이다.

 

앞뜰에 있는 러시아 풍의 건물은 푸이가 주로 생활하던 집희루(緝熙樓)로 만주국 운명의 회한이 서린 곳이다.

 

▲집희루 앞의 비석은 장쩌민 주석이 쓴 잊지말자 9.18 비석

중원은 집무실이 있는 근민루(勤民樓)이고 후원은 조상의 폐위와 불상을 모신 회원루이다.

 

집희루는 1900년대 지어진 건물로 원래는 길림-흑룡강 대외 교통국 건물로 사용됐다고 한다. 1932년 푸이가 이름을 집희루로 바꾸고 본관 건물로 사용했으며, 만주국 시기 동안 황후인 완용(완룽), 측실인 탕위링과 살았다고 한다.

 

집희루 안쪽으로 들어가면 일본 관동군 대장과 만나는 푸이의 모습과 왕후 완용이 아편을 하는 모습을 밀랍 인형으로 재현해 놓았다.

 

▲좌-아편을 하는 황후 완용 ▲우-수감생활 때 양말을 꿰메는 푸이 ▼좌-연회장 ▼우-일본 관동군 대장과 푸이

집희루를 나오면 건물 앞쪽에 일본에게 당했던 치욕을 중국민들에게 상기시키기 위해 장쩌민 전 주석이 썼다는 ‘잊지 말자 9.18’이란 내용의 글씨가 비석에 새겨져 있다.

 

동원은 주로 후에 증축한 건물인데 동덕전(同德殿)과 어화원으로 되어 있다.

 

서원과 동원은 멀리서 보면 우중충한데다 좌우 대칭감이 전혀 없고 건축양식도 제각각이다.

 

이로 미뤄볼 때 당시 황제는 베이징에 있는 자금성에서와 같은 위풍을 누리지 못한 채 그저 꼭두각시 역할밖에 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푸이는 이곳에서 일본인들에 의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했다. 그리고 푸이는 매달 관동군 사령관을 만나 보고를 해야 했다.

 

위만황궁(僞滿皇宮)을 나오면 ‘9.18 만주사변 전람관’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은 일본의 만주 침략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전람관은 지하1층, 지상2층 건물인데 총 1,000여m에 걸쳐 대량의 사진과 문물 및 자료 등을 전시하고 있다. 전람관을 둘러보면 일본의 끔찍하고도 잔혹한 중국 침략사에 몸서리가 쳐 질 정도다.

 

일본은 20세기 초중반 만주에서 사람으로서는 하기 힘든 만행을 저질렀다.

 

일본관 동군은 1928년 6월 랴오닝성(遼寧省) 선양(瀋陽) 부근의 황구툰(皇姑屯)에서 철도에 폭약을 장치해 당시 동북지역 군벌이던 장쭤린(張作霖)을 폭사시킨 뒤 1931년 9월 18일‘9.18만주사변’을 일으켰다.

 

밤 10시20분 일본 관동군은 선양 북쪽 류탸오후(柳條湖)지역의 남만주철도를 폭파하고 무고한 백성에게 중국동북군 군복을 강제로 입혀 총살시키는 자작극을 벌였다. 그 뒤 인근에 주둔하던 중국군 7여단에 누명을 씌워 공격하는 식으로 사건을 조작해 고의로 9.18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장악했다.

 

▲화원

일본은 만주사변 6개월 뒤인 1932년 3월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를 톈진(天津)에서 창춘(長春)으로 데려와 만주국(滿洲國)을 세우게 한다.

 

이는 꼭두각시 정권인 만주국을 통해 만주 땅을 떡 주무르듯 주무르기 위한 치밀한 음모였다. 그때부터 만주 지역은 일본의 대륙 침략을 위한 전진기지가 되었다.

 

중국은 오늘날 이곳을 일본의 중국 침략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애국주의 교육 기지로 삼고 있다.

 

 

▲푸이황제가 타던 자동차.

 

<취재협조 중국국가여유국서울지국 www.visitchin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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